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톤 체호프 (문단 편집) == 생애 == 1860년 [[러시아 제국]]의 [[타간로크]](Таганро́г)에서 태어났다.[* 현재 러시아 남서부 [[로스토프주]]에 위치한 도시로, [[아조프 해]]와 접한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노]]였다. 할아버지 대에 자수성가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고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의 규모의 잡화상을 운영하였으나 아버지 대에 가게가 파산하여 집안이 몰락하였다. 맏이인 체호프는 일찍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는데, 당시 의대생이었던 체호프는[* 이때는 아직 학부생 신분이긴 했지만 가난한 사람이 병원 갈 돈이 없어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환자의 집까지 찾아가서 기초적인 치료를 무료로 해 준 적이 많았다고 한다.] 푼돈이라도 벌 목적으로 취미로 쓰고 있었던 단편소설들을 시험삼아 여러 출판사에 보내 보았다. 그런데 이 원고가 호평을 받으면서 그도 자신의 문학적 재능에 크게 고무되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전업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당시 [[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하층민이 그냥 대학도 아닌 의대를 나온 것도 상당히 의외인 일인데 심지어 [[귀족]]들의 직업으로 여겨진 문학가의 길을 택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케이스였다. [[냉전]] 시절까지는 러시아 제국 시대의 역사가 외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의 문학가와 사학자들은 당연히 그가 귀족 출신일 것이라고 확신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알려져 있었지만 [[소련 붕괴]] 후 [[러시아 혁명]] 이전의 역사가 대대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체호프가 하층민 출신의 문학가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엄청난 수의 단편 소설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1886년 한 해에만 무려 '''116'''편의 단편을 썼고 1887년엔 '''69'''편을 썼다. 작가 생활 초기에는 정말 취미 정도의 이야기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글을 많이 쓰게 되면서 점점 작가로서 성장하며 진지하고 철학적인 주제를 내세우게 되었다. 당시 유럽 출판계에서는 원고료를 단어 수와 비례하게 매겼기 때문에 이 시기의 유럽 소설들은 대부분 분량이 매우 방대했다. 도박으로 빚을 많이 졌던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 유별나게 긴 것도 이 때문이다.[* 다른 동네 이야기긴 하지만 [[프랑스]]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나 [[빅토르 위고]]의 작품들이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주제의식에서 벗어나지는 않는 러시아 소설에 비해 프랑스 소설은 소설의 주된 서사 진행에서 이탈해서 딴소리를 늘어놓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노골적인 분량 늘리기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편.] 반면 체호프는 반대로 간결하면서도 재미있는 글을 쓰는 경향을 보였다. 이후 1890년 체호프는 작가로서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계기가 된 [[시베리아]] 횡단 및 [[사할린]] 여행을 떠났다. 이전까지 체호프는 [[레프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이 여행에서 얻은 경험을 계기로 체호프 본인의 독자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더불어 여행 경험을 토대로 체호프는 여행기 <시베리아에서>와 사할린 관찰 보고서인 <사할린 섬>을 집필, 출판하였다. 사회 고발적인 성격이 강한 [[수필]]이다. 당시의 시베리아나 사할린은 유배지이자 러시아 제국에서도 가장 변방이었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가난은 물론이며 정부의 탄압과 무관심에 시달렸던 지옥같은 곳이었다. 의사이기도 한 체호프는 학부생 때 그랬던 것처럼 여행 중에 무상으로 주민들을 진료해 주기도 했는데 이 덕분에 [[소련]]에서도 인민을 위하여 봉사한 작가라고 존경받았다. 불행히도 체호프는 이 여행 이후 [[결핵]]에 걸려 자주 앓아눕기 시작했다. 그를 걱정하던 형과 아버지도 [[결핵]]으로 죽어서 그도 전염되었다는 설도 있고 시베리아 여행에서 환자들을 진료해 주면서 전염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그는 결핵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자 자신이 언제든 곧 죽을 수 있음을 각오하며 살았다고 한다. 1900년에는 러시아 문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되어 회원이 되었지만 2년 뒤에 아끼던 후배인 [[막심 고리키]]가 반체제 혐의로 아카데미에서 제명 처리되자 그는 이를 반대하였다. 아카데미에서는 저명 인사였던 그를 설득했지만 스스로 아카데미에서 탈퇴하였다. [[파일:chekhovolga.jpg]] 1901년 5월 25일에 자신보다 8살 연하인 33세의 배우 올가 크닙페르(Olga Knipper,1868~1959)와 결혼했다. 하지만 점차 결핵 증세가 심해지기 시작한다. 1904년 1월 17일 자신의 새 연극 <벚꽃 동산>이 초연될 때 그도 무대에 나와서 인사를 했는데 그야말로 곧 죽을 사람을 연상시킬 정도로 쇠약해진 얼굴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관객들이 '''"보내시오! 제발! 안톤 파블로비치를 제발 병원에 보내시오!"''' 라고 소리를 질렀고 결국 체호프는 연극이 끝나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병원에서 치료도 받고 [[독일 제국|독일]] 바덴바일러에서 요양도 하면서 조금 건강이 괜찮아진 체호프는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여섯 달도 못 가서 1904년 7월 15일 밤에 갑자기 고열과 여러 증세를 보였으며 벌떡 일어나서 [[독일어]]로 '''"나는 죽는다(Ich sterbe/이히 슈테르베)!"'''라고 소리쳤다. [[독일인]] 의사가 와서 진료했으나 얼마 안 가 의사는 조용히 청진기를 내리고 고개를 돌리며 말하길 "마지막 가는 길에 [[샴페인]]을 주도록 하세요." 이 말에 아내인 올가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샴페인을 따랐고 결국 마지막으로 샴페인을 입에 머금은 그는 미소를 지으며 [[유언]]을 남겼다. >'''"Давно я не пил шампанского."''' > '''"얼마만에 마셔 보는 샴페인인지."''' 그리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희곡 쪽에서 구태의연한 러시아 사회를 향해 의미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는 그의 작품세계가 점점 원숙미를 더해가던 중 한창 젊은 나이인 44세로 요양하던 독일 바덴바일러에서 [[요절]]했다. 러시아 정부는 그의 시신을 특별히 냉동열차로 운반해 조국에 묻힐 수 있도록 배려했다. 비슷한 시기에 병으로 죽은 러시아 제국 장군인 표도르 켈러(1850~1904)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체호프의 죽음을 애도하러 온 사람들이 착각하여 켈러의 장례식에 참석한 일도 있었다. 체호프는 노보데비치 무덤에 묻혔는데 [[니콜라이 고골]] 등 러시아의 여러 유명 예술가들도 묻힌 곳이다. [[레프 톨스토이]]가 무척 아끼던 후배였기에 톨스토이와도 여러 번 만났고 그도 톨스토이를 존경하였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다 보니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톨스토이는 매우 슬퍼했으며 당연히 장례식에 참석했다. 아내 올가와의 결혼 생활은 불과 3년뿐이었고[* 또한 올가가 연극배우 활동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적지 않았고 때문에 3년 동안에도 부부가 함께했던 시기는 길지 못했다. 대신 두 사람은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https://brunch.co.kr/@krasibaya/32|400편이 넘는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으며]] 이들 내용은 체호프의 만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다. 올가는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배우로 꾸준히 활동하며 장수를 누리다가 55년 만인 1959년에 만 90세로 사망했다. 그녀는 [[소련]] 시절에도 '인민을 위하여 봉사한 작가'라고 호평받으며 더 많이 출판되던 체호프의 책과 연극, 영화에 대하여 일부 판권을 인정받아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게 지낼 수 있었으며 체호프를 그리워하는 회고록도 썼다. 고향인 타간로크에는 그를 기념하는 문학 박물관과 오페라 발레극장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